코엘료-알레프 정리되지 않은 생각

알레프는 코엘료가 말하길 태초부터 영원까지 모든 것이 한 지점에 존재하는 것이라는 형이상학적 표현으로 정의하고 있다.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알레프를 통해서 과거의 내 존재함을 확인할 수 있는 듯 한데, 불교의 용어로 카르마, 즉 내가 가지고 있는 업()이 어떻게 생성 되었는지를 내 본질 스스로가 확인할 수 있다는 데에서 의미를 가질 수 있다.

 

이야기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과거의 사랑에 대한 상처,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세 사람이 여행을 한다. 그 중 한 사람은 샤먼을 통해 이미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연인의 끊을 놓지 못하며, 다른 둘은 전생에 인연의 비극으로 인하여 업을 안고 있는 존재다. 현 존재가 자신에 대한 업의 본질을 잘 알지 못하나 결국, 알레프를 통해서 그 업의 본질에 대해서 파악하게 된다. 업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업의 끈을 끊을 수 있는 해결점을 찾도록 노력할 수 있다는 데에서 의미가 있을 수 있다. (이에 대해서는 칼 구스타프 융의 심리적 치료의 접근법과 유사한 듯 하다. 그가 환상이나 꿈에 대한 역사적 또는 신화적 해석을 통해서 문제의 원인이 되는 부분에 접근했다는 부분에서 본다면, 알레프를 통해 본 그 환상을 해석함으로써 트라우마의 원인을 파악하는 부분은 매우 유사하지 않을 까) 다음은 그러한 전생의(또는 과거의) 업에 대해서 현 존재가 받아드리는 방식에 대한 코엘료의 답변이 아닐까 한다.

 

우리는 과거에서 배웠지만 우리가 그 결과물은 아닙니다. 우리는 과거에 고통 받았고, 과거에 사랑했고, 과거에 울고 웃었습니다. 하지만 그런 사실들은 현재에 아무런 쓸모가 없어요. 현재에는 현재의 도전, 현재의 나쁜 일과 좋은 일이 있을 따름입니다

<알레프, “빗속의 눈물처럼중에서>

 

덧붙여 약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부분은 다음의 문장이었다.

 

산다는 것은 경험하는 것이지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고 앉아 있는 것은 아니다.(99p)”

 

개인적으로 게으름의 소산일지 모르지만, 나중에 진정으로 삶의 기쁨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던 자기 성찰의 방법인 내 책상에 앉아 앞서간 성인들의 기록을 통해 내 삶의 의미를 찾고자 했던 방식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을 수도 있음을 생각해 보게 된다.


덧글

  • f 2011/10/31 01:16 # 삭제 답글

    아따 볼라뇨가 말하기를 코엘료는 남미 일일 드라마에 나오는 마법사 같다고 했당께
  • jain 2011/11/08 12:14 # 삭제 답글

    나 자신과 만남. 알레프 어렵다
댓글 입력 영역